우리나라 삼대사찰 한국 삼대사찰 알아보기
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우리나라 삼대사찰 한국 삼대사찰 알아보기

by 솔직당근 2024. 7. 24.
728x90
반응형

불교와 유교 문화권인 우리나라에는 예로부터 사찰이 많았습니다. 

사찰에도 순위가 존재할까요?

정확한 순위는 없지만 절 중에 이른바 '삼보사찰'이라 불리는 곳은 있습니다. 

 

오늘은 삼보사찰의 뜻과 삼보사찰에 해당하는 절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한국 10대사찰

 

우리나라 유명사찰

 

먼저 우리나라 유명사찰 순위, 10대 사찰이 궁금한 분들은

위 버튼을 누르면 됩니다. 

 

삼보사찰이란?

삼보사찰이란 '세 가지 보배'라는 뜻입니다. 

이 세 가지 보배는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의미하는 불보, 

부처님의 가르침을 뜻하는 법보, 

국사를 배출한 승보를 뜻합니다. 

 

불보, 법보, 승보는 불교에서 귀하게 여기는 세 가지 보배를 이릅니다. 

 

우리나라 삼대사찰

 

우리나라 3대 사찰 명단은 아래와 같습니다. 

 

1. 양산 통도사

한국 3대 사찰의 하나로, 부처의 진신사리(眞身舍利)가 있어 불보(佛寶)사찰이라고도 한다. 사찰의 기록에 따르면 통도사라 한 것은, 이 절이 위치한 산의 모습이 부처가 설법하던 인도 영취산의 모습과 통하므로 통도사라 이름했고(此山之形通於印度靈鷲山形), 또 승려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두 이 계단(戒壇)을 통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했으며(爲僧者通而度之), 모든 진리를 회통(會通)하여 일체중생을 제도(濟道)한다는 의미에서 통도라 이름지었다고 한다.

이 절의 창건 유래에 대한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신라 자장(慈藏)이 당나라에서 불법을 배우고 돌아와 신라의 대국통(大國統)이 되어 왕명에 따라 통도사를 창건하고 승려의 규범을 관장, 법식(法式)을 가르치는 등 불법을 널리 전한 데서 비롯된다. 이때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하고 금강계단(金剛戒壇)을 쌓아, 승려가 되고자 원하는 많은 사람들을 득도케 하였다.

이렇게 창건된 이 절은 이후 계율의 근본도량이 되었고, 신라의 승단(僧團)을 체계화하는 중심지가 되었다. 창건의 정신적 근거이며 중심인 금강계단은 자장과 선덕여왕이 축조하여 부처의 진신사리를 안치한 이후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한국 10대사찰

 

우리나라 유명사찰

 

2. 합천 해인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로서 2009년 12월 21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신라 제40대 애장왕(哀莊王) 때의 순응(順應)과 이정(利貞)이 당나라에서 돌아와 우두산(牛頭山:가야산)에 초당(草堂)을 지은 데서 비롯된다. 그들이 선정(禪定)에 들었을 때 마침 애장왕비가 등창이 났는데 그 병을 낫게 해주자, 이에 감동한 왕은 가야산에 와서 원당(願堂)을 짓고 정사(政事)를 돌보며 해인사의 창건에 착수하게 하였다. 순응이 절을 짓기 시작하고 이정이 이었으며, 그 뒤를 결언대덕(決言大德)이 이어받아 주지가 되었다. 918년 고려를 건국한 태조는 당시의 주지 희랑(希郞)이 후백제의 견훤을 뿌리치고 도와준 데 대한 보답으로 이 절을 고려의 국찰(國刹)로 삼아 해동(海東) 제일의 도량(道場)이 되게 하였다.

1398년(태조 7)에 강화도 선원사(禪源寺)에 있던 고려팔만대장경판(高麗八萬大藏經板)을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이듬해 이 곳으로 옮겨와 호국신앙의 요람이 되었다. 그 후 세조가 장경각(藏經閣)을 확장·개수하였으며, 그의 유지를 받든 왕대비들의 원력(願力)으로 금당벽우(金堂壁宇)를 이룩하게 되었다. 제9대 성종(成宗) 때 가람을 대대적으로 증축했고, 근세에 이르러서는 불교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

 

3. 순천 송광사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이다. 대길상사(大吉祥寺) · 수선사(修禪社)라고도 하며,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우리 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의 하나로 승보사찰(僧寶寺刹:훌륭한 스님을 가장 많이 배출함으로서 얻어진 이름)로서 매우 유서깊은 절이다.

송광사의 창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송광사사적비()」와 『승평속지()』 등을 보면, 신라 말에 창건되었고, 그 당시에는 길상사()라 불렸으며, 승려 수는 30명 내지 40명을 넘지 못하는 규모의 절이었다.

그 뒤 고려 인종 때의 석조()가 중창하려는 원()을 세우고 역부()를 소집하고 임목()을 준비하였으나, 완공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그 뒤 얼마 동안 길상사는 거의 폐허화되었다.

 

한국 10대사찰

 

우리나라 유명사찰

 

반응형